05년 현장학습 체험기 - 이세라 | |||||
작성자 | 이** | 작성일 | 2011-05-17 | 조회수 | 1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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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년 현장학습 체험기 - 이 세 라
샹베리에서의 일년 샹베리에서 지내면서 내가 부쩍 성장한 느낌이다. 우선 나의 절친한 친구 소피의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한다. 우연히 학교를 오가며 만나게 된 소피. 소피는 SAVOIE대학교의 불어불문과 MASTER1 학생이다. 같은 전공과목으로 인해 우리는 참으로 많이 친해졌다. 소피 주변에 있는 같은과 학생들과 독일친구 2명과 같이 Croix du Nivolet에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거의 정상까지 차를 타고 올라간 뒤 약 1시간 반가량 Croix du nivolet까지 걸었다. 시기가 10월 쯤이라 날씨가 약간 쌀쌀했다. 그러나 걸으면서 땀도 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정상에서는 각자 싸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소피가 싸온 초콜렛 케익의 맛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기서 만난 독일 아이들은 프랑스 가정에서 베이비 시팅을 하면서 그 집에서 지뺨 아이들이다. 나이는 나랑 같았는데, 불어는 정말 잘했다. 이외에 학교에서 가끔 만나는 사라와 셀린 등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소피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멀리 나가시고 안계셔서 처음 프랑스 집을 방문한 나에겐 다행이기도 했다. 소피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시고 소피의 어머니는 SAVOIE대학의 프랑스어과 교수님이시다. 소피의 큰 오빠는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일을 한다. 얼마전 바캉스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지금 한창 BAC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자기네반 반장이다. 이름은 마리인데, 여러모로 내가 프랑스 고등학생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착한 친구이다. 소피의 남동생은 내 동생과 동갑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 내동생과 똑같은 점이 참 많았다. 정말 놀랐던 것이 취미와 싫어하는 것이 거의 일치 했다. 기타치는 것은 똑같았다. 남동생이름이 프랑소와 가브리엘인데 집에선 파오웰이라 불렀다. 파오웰은 유도를 배우는데 이번해에는 하는게 너무 많아서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 남동생은 유도는 아니지만 무에타이, 복싱등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둘다 검은띠에 만화책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엄마랑 공부 안 하는 걸로 다투는 것, 비싼 초콜렛 많이 먹어서 말다툼 하는 것 등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집이나 소피집이나 사람사는 집은 거의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랑스로 오기 전 나의 프랑스에 대한 느낌은 뭔가 약간 차갑고, 아주 엄하고 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생각은 완전 달라졌다. 지난 겨울 소피 어머니, 마리, 소피와 나 는 다 같이 한국음식을 해먹은 적이 있다. 마리가 채식주의자라 부침개, 볶음밥등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만으로 해먹었는데, 특히 소피 어머니께서 일본과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한국 문화에 대해 솔직히 요즘 문화를 생각하면 별다르게 설명할 것이 없다. 마리가 방과 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나 내 동생이 야자 끝나고 메신저로 친구들과 수다떠는 것이나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집을 떠올렸다. 우리 외갓집은 전형적으로 한국문화를 따르는 식구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면 외할아버지께서 부정탄다고 왼손을 못쓰게 하시던 기억을 떠올려 소피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자기 어렸을 때도 소피 할머니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외에 바닥에 앉아서 작은 식탁에 밥 먹는 것, 가옥 구조 등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고 자주 소피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우리집과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우리집에선 항상 국을 담을 때 아버지, 언니, 나, 동생 순인데 소피집은 정 반대다. 우선 나부터 그리고 마리, 파오웰, 소피, 아버지 순이다. 후식을 나눌 때도 아버지께선 항상 우선 작은 아이 부터 라면서 맨 뒤 차례까지 기다리셨다. 나는 이런 방식이 더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소피네 집에 자주 드나들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나쁜 습관을 발견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등 나의 무르익음에 소피네 가족이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방학 때!!! 소피 어머니께서 성탄절을 같이 보내자고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보다 더 좋은 행운이 있을까! 단 며칠동안 나는 소피네 가족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약 5일간 소피네 집에 머물면서 프랑스의 노엘방학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소피 아버지께선 장남에 모든친척들이 샹베리에 사는 전형적인 샹베리인이시다. 시골에 1869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 있는가 하면 크리스마스때 온 친척들이 모여 다같이 점심을 먹는 등 나에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소피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다들 둘러앉아 거위간 요리와 연어를 먹고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후식을 나누어 먹었다. 특별한 날에 자주 꺼내는 샴페인도 빠질 수 없었다. 나도 맛을 약간 보았는데 별로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거위간 요리 대신 연어를 먹었는데 의외로 참 맛있었다. 소피 친척중에 나에게 거위간을 싫어하냐고 묻는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어를 더 좋아한다고 대답하였다. 저번에 소피 부모님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것에 대해 물으신 적이 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소피 어머니께서 아주 맛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맛이 좋다고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이유는 좋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지 결코 맛이 좋아 먹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주 소피네 가족들은 맛을 참 중요시하게 여겼다. 맛을 위해 버터를 아무렇지 않게 듬뿍 넣고, 설탕을 한 소쿠리로 넣는 등 나에겐 약간 충격 이었다.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우리에겐 맛이 좋지만, 김치 만들때 고춧가루 한소쿠리 넣는 것이나 별다를게 없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소피가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 젓가락 끝에 고추장을 살짝 묻혀 맛보게 했는데, 맵다며 빵을 냅다 집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조금이었는데 소피에게는 참 매웠는가 보다. 크리스 마스 이브날 난 소피 가족과 소피 외할머니와 다같이 샹베리에서 차로 한 20분 걸리는 곳으로 가서 미사를 보았다. 성당이 아닌데 사람들이 워낙에 많이 모이다 보니, 체육관에서 미사를 드렸다.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이에게 평화를 나누는 시간에는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에게 각국의 나라 말로 평화의 인사를 앞에 나와서 대중에게 하는 것을 부탁하셨다, 덕분에 나는 좀 쑥쓰러웠지만, 제단에 나가 우리나라 말로 평화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저녁 때 소피와 밤거리를 잠시 거닐다 자기 전 벽날로 앞에 놓여져 있는 신발에 선물을 몰래 얹어 놓고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우리는 선물들을 뜯으며 고마움의 인사를 하고,벽난로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하는 등 따뜻한 크리스 마스를 보냈다. 한해의 마지막날 나는 소피와 소피 외할머니 집을 방문하고 소피네 집에서 DVD를 보았다. 다른 가족들은 친구집에서 보낸다고 나가고 없는 터였다. 소피네 집은 시내에 있는데 소피네 집엔 TV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DVD를 빌려다 보았다. 벌써 한해가 지나고 이사할 때가 되었다. 나는 보증금 때문에 주저하던 탓에 소피 어머니께서 인맥으로 집을 알선해 주셨다. 보증금도 없어서 나에겐 참 좋은 기회였다. 처음엔 프랑스 가정에서 사는 것에 대해 약간 부담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여기서 살면서 요리도 할 수 있고 케익 만드는 방법, 몇가지 프랑스 요리등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워둔 탓에 친구집에 초대 받았을 때나 어디 놀러갈 때 싸갈 수 있어 참 편리 했다. 그러나 이 집에 살면서도 거의 소피네 집에 자주 들락거려 마침내는 내 거주지가 불투명해질 정도 였다. 겨울이 지나고 3월 내내는 비가 참 많이 왔다. 신발을 하나밖에 들고 오지 않은 나는 매일 양말이 젖기 일쑤였다. 봄이 시작되면서 나는 새친구들 사귀기 시작했다. 정글링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 나에게 참 친근하게 잘 대해 주었다. 마크와 엘로디. 마크는 여자친구가 퀘벡에서 공부를 하고, 5월 말에 돌아왔다. 마크는 화학을 전공하다 그만두고 이번해에 그르노블에서 수화를 공부할 예정인 학생이다. 엘로티는 화학을 정공하는 공대 여대생이다. 처음에 얘네들을 만났을 땐 참 잘생겨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이렇게 친해지고 나니 느낌이 색다르다. 그런데 소피와 이들은 분위기가 다른 탓에 다 같이 모여 저녁도 먹고 소풍도 가고 싶었지만, 기회가 잘 닿지 않았다. 게다가 소피는 8월말이나 9월 쯤에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라 점점 바빠지고 있는 터였다. 1월 말엔 정말 정말 바빴다. 여기서 있던 친구들도 떠나고, 이사하고, 그리고 1월부터 배우기 시작한 승마에서 부터 장을 보는 일까지. 특히 장보는 것을 정말 귀찮았다. 차가 없어서 인지 한번에 많을 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엔 요령이 생겨 없으면 그냥 없는대로 다른 것을 대체 했다. 정글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른 면의 프랑스를 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헤미안 문화를 좋아하고, dread머리에 인도풍 옷에 독특했다. 점점 나도 이들에 흡수되면서 집시가 뭔지 알게 되고 이로 인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반에서는 북유럽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스웨덴의 북부는 겨울동안 정말 해가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본인에게 직접들으니 신기했다. 수업은 문법 수업만 빼면 다들 재밌었다. 교수님들이 대학에서 강의 하시는 분들이라 문학, Civilisation,독해 등 다양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Civilisation시간엔 프랑스의 전반적인 역사, 문화, 오늘 날 등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이 시간엔 각자 한 주제에 대해 발표하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국제 결혼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마침 우리반에 부모님께서 다른 국적을 가지고 계신 학생들이 몇 있어서 보다 재미있게 토론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문학시간엔 예전에 학교에서 배울 땐 잘 몰랐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빅토르 위고가 누군지, 프랑스 시의 형태가 어떻게 되는지, 장문시, 고전시, 몰리에르의 삶, 그의 작품등 이외에도 Quenous가 왜 'e'를 빼고 글을 썼는지, 'i' 와 'e'만을 쓴 글을 함께 보기도 하고, '마농의 샘', 내가 고등학교 때 우연히 tv에서 본 영화를 공부해 보기도 하였다. 문법 시간엔 거의 쓰기 위주의 수업이 진행 되었다. 그래도 다 도움이 되는 것들 이어서 좋았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가끔 소피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소피의 큰 오빠인 르네가 Quenous의 작품을 좋아해 집에 Quenous의 책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Quenous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나는 역시나 소피네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우리집에서 부활절날 진짜 계란을 먹었는데 소피네 집은 계란 모양을 한 초콜렛을 먹었다. 소피 어머니께 우리집에서 진짜 계란을 먹는다고 하니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4월 중순 쯤 LOZERE지방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일년에 한번 열리는 것인데, 올해가 3번째라고 한다. 거기서 Lozere지방의 요리도 먹어보고 콘서트, 꽁트등 거의 일주일간 흥겨운 것들이 많이 펼쳐졌다. 나는 마크와 엘로디와 함께 이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가서 서커스 공연도 보고 카니발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도착한 첫날은 비가와서 걱정이 많았지만 다음날 부턴 날이 개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동안 시험을 치른다고 너도나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난 후, 근처 안시에서 만화영화 축제가 열렸다. 마크와 Valence에 사는 기욤이 거기서 봉사활동을 해서 엘로디와 함께 구경하러 같이 갔다. 소피와 마리도 봉사활동을 하는 탓에 겸사겸사 가 보았다. 평소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터라, 관심을 가져 볼 만도 했다. 안시에 도착하자 마자 안시에 사는 믈로와 그의 여동생, 미쉘등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만화영화 축제를 보러 온 것이다. 이튿날 저녁엔 '마리 포핀스'를 파키에에서 상영을 해 담요를 깔고 편하게 보았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내가 너무 좋아하자 마크가 영어 DVD를 구해다 주었다. 넷째날 부터는 Bonlieu에서 'Azur, Asmar' 라는 이슬람 문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프랑스 감독이 만화영화로 제작을 해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얻었다. 마크와 마크 어머니와 엘로디와 함께 봤는데 다들 감동 깊었다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파키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를 상영해 친구들과 함께 본 후 , 다음날 '독수리 오형제', '은하 철도 999'등을 제작한 Yoshitaka Amano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좋을 기회를 얻었다. 마크와 기욤, 특히 기욤이 그의 광적인 팬이었다. 강연의 마직막에 그가 직접제작한 짧은 만화 영화와 그가 대중들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등 좋은 경험이었다. 주위의 일본인 친구들에게서 배운 일본어 몇마디가 이날 사용될 줄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우린 줄을 뒤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자리에 앉아 볼 수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고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끝나자 마자 Yoshitaka Amano는 잽싸게 강연회장을 빠져 나가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마크가 봉사활동하면서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온 한국사람들을 봤다고 한다. 마침 강연회장과 같은 건물이기에 우리는 잠시 들려 이것저것 물으며 한국사람을 만난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분들은 파리에 있으면서 한국만화편찬을 기획하는 공기업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샹베리에 있으면서 만화의 문화전파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한국 영화는 이제 샹베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안시에 있으면서 소피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에겐 참으로 좋은 시간들이었다. 문득 한비야씨께서 한 말이 생각 난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엔 이게 다 내 복이려니 생각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들이 다 빛인 것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게 다 빛인 것이다. 샹베리에 살면서 여러 프랑스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 나에게 잘해주는 이, 정말 딱딱하게 구는 이, 한국을 아주 후진국으로 보는 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말도 제대로 안통하고 한국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하는 데다 아시아 여자에 대한 환상들이 나를 너무나 괴롭혔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었고, 사소한 작은 일들 큰 것들을 가리지 않고 도움을 받고, 잘 정착 할 수 있었다. 정말 마음 속 깊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여기 지내면서 토리노 올림픽, 프랑스 내 이곳저곳, 이탈리아, 스위스등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별 깊은 감회를 느끼지 못했다. 작년에 이미 유럽여행을 한 터였고, 정말 배낭하나 매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면 별 특별한 것이 없는 여행이라 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간의 날들이 나에겐 정말로 잊을 수 없는 멋진 경험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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